‘천왕할머니’는 지리산 일대에서 전해 내려오는 여성 산신입니다. 민간신앙과 무속 전통 속에서 지리산을 수호하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끄는 여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이름은 ‘하늘(天)의 왕(王)’과 ‘할머니’라는 신성하고 따뜻한 상징이 결합된 것으로, 단순한 자연의 수호자가 아니라 민중의 삶과 함께하는 영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천왕할머니는 ‘지리산 성모’, ‘산할머니’, ‘여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오랫동안 지역 사람들의 기도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전설 속 이야기 – 다섯 고을을 나누다
이 여신에 대한 전설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천왕할머니는 지리산 천왕봉에 앉아 산세를 둘러보고, 골짜기를 갈라 다섯 고을로 나누어 인간이 살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옵니다.
이는 단순한 창조 설화라기보다는, 지리산이 사람의 삶터가 되도록 터전을 열어준 존재로서 천왕할머니를 기리는 민간의 신화적 해석입니다.
역사 속에도 등장한 산신 신앙
지리산 천왕할머니는 단지 전설 속 인물에 그치지 않습니다. 역사 기록에도 산신을 국가적 존재로 섬겼던 흔적이 보입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자신의 어머니를 지리산 산신으로 봉하고, 국가 수호신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고려 태조 왕건 역시 어머니 위숙왕후를 산신으로 모시고 봄·가을에 제례를 올렸다는 전승이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지리산의 산신 신앙은 민간을 넘어 왕실 신앙에도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깊은 뿌리를 가진 전통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여신의 얼굴, 지리산 성모상
천왕봉 인근에는 한때 천왕할머니를 형상화한 성모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조각상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오랜 시간 동안 등산객과 무속인, 지역민들의 신앙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사라졌다가, 1987년에야 복원되어 지금은 산청군 시천면의 천왕사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이 돌상은 단지 조각물이 아니라, 지리산의 정기와 여성 산신 신앙의 상징 그 자체였습니다.
새 성모상, 다시 천왕봉으로
최근에는 천왕할머니 신앙을 계승하고자, 새로운 지리산 성모상이 옥돌로 제작되었습니다. 시천면사회단체협의회의 건의로 추진된 이번 사업은 지리산국립공원 측과 협의하에 진행되었고, 새로운 성모상은 높이 1m, 폭 0.7m, 무게 900kg에 달하는 견고한 조각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당초 6월 21일, 지리산 천왕봉 인근에서 성모상을 안치하고 제례를 봉행할 계획이었으나, 호우 예보로 인해 헬기 운용이 어려워 행사는 연기되었습니다.
산청군 관계자는 “기상이 좋은 날을 다시 잡아 새 성모상을 천왕봉에 안치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여전히 살아있는 전통, 그리고 영혼의 산
지리산은 단순한 국립공원이 아닙니다. 우리 민속과 전통,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영적인 연결이 살아 숨 쉬는 공간입니다. 천왕할머니는 그 신념과 기억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바위로 깎인 조각상 속에 갇힌 과거가 아니라, 지리산을 찾는 이들의 기도 속에서 여전히 숨 쉬는 여신입니다.